타이틀 | 피바다 광주학살 현장기록, 외국인이 쓴 현장 일기, 책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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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평화봉사단 단원들이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왼쪽에 카메라를 든 인물이 위르겐 힌츠페터이고 오른편 4명(차례대로 쥬디 챔벌린, 팀 원버그, 폴 코트라이트, 데이비드 돌린저)이 평화봉사단 단원들이다.
출판기념회, LA교육원에서 5월18일 열려
평화봉사단원 나주 근무중 광주5.18 겪어
철수명령에도 4명 광주 남아 참상 기록
독일기자들에 통역 협조, 세계 특종보도
광주 재방문 기대, 코로나로 초청 지연
비밀문서 해제로 미 정부 과오 드러나
“미국은 5․18 재조사와 잘못 사과해야”
5.18 참여 외국인들 증언, 자료 기대커
42년전,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26세의 청년은 미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 인근 시골마을 호혜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돕는 ‘푸른 눈의 청년’이었다.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는 일상처럼 한센 환자들의 건강검진을 돕기 위해 광주를 들렀는데 그때 ‘5․18’이 터졌다. 그리고 미 정부로부터 ‘광주에서 떠나라’라는 철수명령을 거부하고, 단원 4명이 광주에 남았다. 나주와 광주 접경에 설치된 경계선을 두고 대치한 시민군과 계엄군 때문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역할이 생각되었다. 평화봉사단원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외면할 수 없었다.
그때 그 현장에서 학생, 시민들과 함께 ‘피바다 광주’의 소리와 절규… 그 모습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중 외신기자들이 광주에 오자 통역을 해주며, ‘5․18의 소리’가 전세계에 전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42년이 흘렀다. 68세의 반백의 공중 보건학박사로 은퇴한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아직도 그날의 행위에 사과를 하지 않고, 또한 그때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자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회고록을 펴냈다”고 말했다.
그는 5․18 민주항쟁 40주년을 앞두고 2년전에 펴낸 ‘5․18 푸른 눈의 증인’(Witnessing Gwangju, 한림출판사 2020)은 외국인 쓴 최초의 5․18 광주민주화항쟁 증언록이다.
올해도 여전히 오월은 온다. 본보도 올해 연속기획시리즈를 기획 보도한다.
강 산 <탐사보도팀>
‘집담회’
증언록이 출간되자마자 광주에서는 ‘집담회’가 열렸다. 2020년 6월, 전남대에서 코로나로 여행이 어렵게 되었지만 번역자 최용주를 초청해 집담회를 갖고 ‘새로운 증인과 다양한 해석’을 주제로 당시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군, 경찰, 그리고 평화봉사단이나 외신기자로 사건을 목격했던 외국인들의 증언을 통해 5․18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해 나가고 있다.
집담회 의의에 대해서는 “벽안의 미국인 청년들이 피 흘리며 쓰러진 광주시민에게 보내는 연민과 분노, 연대의 정신이 아름다웠고, 고립된 광주의 비극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그들의 용기가 고마웠다”고 밝혔다.
증언을 통해 전두환 사망에 대해서도 “전두환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그가 무기징역 선고 후 사면돼 한국 국민들 사이에서 살도록 허락되지 않았어야 하고, 국민들에게 한 짓을 반성하며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어야 하는 이유다”라며 “우리는 그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그 과정과 역사를 기억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그와 같은 사람이 정권을 잡지 않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또 “전두환이 광주시민들에게 사죄했다면 조금이나마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을 것이다”라며 “화장실 가는 길에 쓰러져 죽었다는 건 안타깝지만, 그가 자신의 권력과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고통 받던 국민들에게 사죄하지 않았으니 굳이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 도널드 베이커 “나는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때문에 광주의 친구들과 한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역사는 최종 심판관이다. 전씨는 1980년 짧은 승리를 거뒀을지 모르지만, 불명예스럽게 죽었고 대한민국이란 아름다운 천에 묻은 얼룩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반면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으로부터 빼앗으려 했던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되찾았다. 광주시민, 그리고 한국의 모든 국민들은 최후의 승리자이며, 여러분은 이 점을 확신해도 된다.”
- 데이비드 돌린저 “5․18 학살의 주범이 죽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이제 더욱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5․18 당시 광주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 진실의 조각을 지니고 있다. 전씨의 죽음은 5․18 이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그리고 5․18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얼마나 빨리 노력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 폴 코트라이트 “광주의 정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그것은 회복력과 자부심, 연민이 깃들어 있는 정신이다. 전씨는 이제 ‘과거사’이지만 광주의 정신은 한국인들 사이에 여전히 살아 있고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정신을 한국뿐만 아니라 미얀마와 같이 멀리 떨어진 이들을 위해 어떻게 활용할지 구상하는 게 중요하다.”
평화봉사단원 정신으로 참여
당시 폴 코트라이트는 전남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 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였다. 그는 양팔을 벌리면 벽에 닫는 좁은 방에서도 불평 없이, 달걀과 감자요리를 하면서 음악을 듣던 평범한 26세 청년이었다. 1980년 5월 어느 날, 그는 일상처럼 한센병 환자를 데리고 의례적인 건강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광주 5․18민주항쟁을 목격한다. 이어서 미 정부는 당시 현지의 평화봉사 단원 20여명에게 미국 시민의 안전을 위해 ‘즉시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폴 코트라이트와 동료 데이빗 돌린저(David Dolinger),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 윌리엄 에이모스(William Amos). 팀 원버그(Tim Warnberg) 등은 미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광주가 우리의 마을이고, 마을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폴 코트라이트는 “신군부 계엄당국의 조치로 외부와 차단된 광주에서 우리라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광주에 특파된 TIME지 사진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도청, 전남대병원, 임시영안실 등을 다녔다. 데이빗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 됐다. 팀 원버그는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알려진 독일 제1공영 방송 위르겐 힌츠페터의 통역을 맡았다.
폴 코트라이트는 “통역은 외신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으로 우리 단원들은 생각했다”고 밝히면서, 당시 5월 24일, 전남도청에 마련된 임시 영안실을 TIME 사진기자와 함께 보았던 당시를 떠올렸다. 피투성이의 시신들은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로빈 모이어 사진기자는 폴 코트라이트의 통역을 통해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며 “당신들이 이곳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달라”고 말한 것을 기억했다.
폴 코트라이트는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넘어 “5월 광주”의 참상을 알리러 서울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미 정부의 ‘철수명령’에 불복종하고 전두환 군부의 학살에 대항해 광주에 남아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학생과 시민들의 입이 되었다.
이들, 평화봉사단원들이 죽음을 무릅쓴 용기로 오늘날 5․18 광주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한국의 쿠데타군부는 이 같은 미 평화봉사단의 행동을 ‘괘씸죄”로 몰아 1981년 한국에서의 평화봉사단을 끝내 철수시켰다.
또한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2년전, ‘5․18 민주항쟁 4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받았으나 코로나 사태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는 5․18일 LA 한국교육원에서 열리는 42주년 5․18 광주민중항쟁기념행사장에서 출판기념식을 갖는다.
그는 “80년 5․18 광주 참상이 독일 방송을 통해 세계 곳곳에 알려진 후 이곳 LA에서는 긴급 호남향우회가 조직되고 유학생들과 함께 LA한인타운 등지에서 가두시위와 야간 횃불시위를 열어 미 정부 항의와 신군부의 광주학살에 투쟁했다.
폴 코트라이트는 그러한 5․18 민주항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LA한인타운에서 출판기념회는 의의가 크다. 가능하다면 미주지역을 순회하며 출판기념회를 갖고 의의와 당시 광주참상을 알리는 작업이 추진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자신이 5․18 광주에서 밤새워 쓴 42년 전 일기장과 노트 사본 등 5․18 광주 자료 일체를 USC한국전통도서관(관장 조이 김)에 기증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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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와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인터뷰를 가졌다.
▲2년전, 5․18 40주년을 맞아 ‘‘5․18 푸른 눈의 증인’이라는 5․18광주민주행쟁의 증언을 담은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이 책의 의미에 대해...
폴: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저는 미국인들이 1980년 5월 광주항쟁에 대해 알아야 하며, 이제 미 정부도 사과와 대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뿐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도 중요한 사건입니다.
1982년 말에 저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고, 사회활동도 했으며, 결혼과 함께 자녀를 돌봐야 하는 의무 등등으로 글쓰기에 전념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또 아프리카에서 20여년을 활동 후 2016년에야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5․18 광주에 대한 회고록 글을 쓸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40년 전 광주에서 써내려 갔던 오래된 노트를 다시 꺼내 읽으며 글을 써 나갔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날의 5월 광주와 그곳에서 생활했던 좋은 추억을 되살리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저의 오래된 노트에 쓰여진 글에서 40년 전 일어났던 그때를 다시금 저의 기억 속에서 되살리게 했으며 제 마음속에 40년 동안 깊게 박혀진 장면들을 되새기며 썼습니다
▲5․18 관련 미 당국의 문건들이 최근 해제되면서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있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폴: 당시 미국대사관과 국무부간 문서들을 지난해에 알게 되었고, 제 회고록에도 관련된 부분을 부록에 삽입했습니다. 제가 본 자료들은 시간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였습니다. 5․18 당시 서울 미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전문들이 전두환 군부의 관점이 많이 반영되고 지지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5․18이 끝난 후에는 크게 달라졌는데, 전두환의 주장이 거짓임을 인식했지만 적절한 대응이 없었어요. 그 당시 미 정부나 미대사관이 잘못 대응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전두환 군부에 더 강력하게 대처하여 국민에게 사과를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42년이 지난 지금, 미국 현 정부 역시 기대하기 힘들며 미래에라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 가능할까요? 기록들을 보면서 당시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민주화 소리에 공감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존경하는 것을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광주항쟁이 시작되면서 미국 정부에서는 평화봉사단원 철수를 명령했는데, 동료 3명과 함께 이를 거부하고 현장에 남은 이유는?
폴: 미 대사관의 광주 철수명령을 거절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4명 봉사단원들이 함께 논의해 결정한 것이지만, 첫째, 우리가 광주를 떠나면 봉사했던 마을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남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광주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국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웠습니다. 한인들을 돕고 봉사한다는 평화봉사대원들이 슬그머니 도망간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외신기자들이 광주에 나타날 때까지, 광주에서 다른 외국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광주가 우리의 마을이고, 마을사람들이 우리라고 느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둘째, 제가 미 대사관으로부터 철수 메시지를 받은 날, 아침 일찍 광주를 빠져 나가려고 했습니다. 당시 전두환 군부에 압력을 받은 TV 방송들의 잘못된 상황 보도를 하고 있었기에, 미대사관에 광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서울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과 탱크가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갈수 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군사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이 광주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믿었습니다.
헬기 발포 총탄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반드시 세계에 참상 알려달라’ 절규
▲5월 광주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폴: 5월 광주항쟁 당시 가장 인상에 남는 기억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책에서 언급했지만 광주 버스정류장에서 한 청년이 군인으로부터 구타당하는 모습, 남평 무기고 파괴, 서울 미대사관에 진상을 알리려 광주를 빠져 나가려는데 군인과 탱크들에 의해 저지 당하는 순간, 탈출 하면서 겪은 고초, 전북 도청 광장에서의 시위 장면, 시체들이 싸여 있는 임시 영안실에서 타임지 기자에게 통역하던 때, 등등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5․18’ 내내 저는 학생과 시민들과 함께 현장에서 지내면서 보았던 것들은 무엇이든지 노트에 썼습니다. 충격적인 학살 장면을 쓰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에, 당시 그냥 시민들의 일상부터, 큰 사건들, 모든 일들을 써내려 갔습니다. 매일 매일, 매 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썼습니다.
그리고 1982년 말에 한국을 떠났고 6년 후인 1988년에 결혼 하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일에 몰두해야 했기에 광주에서의 일기장 원고는 깊숙이 보관해 두었습니다. 2017년,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5․18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오래된 사명감이 다시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2019년 5월 광주를 포함해 남평, 호혜원 등을 방문하기 전 이미 많은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광주 등 현장을 다시 갔을 때 그때의 모습, 그때 시민들의 소리 그리고 그때의 피비린내 났던 냄새에 대한 기억이 똑똑하게 되살아 나옴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5․18 당시 서울의 미대사관에 가서 광주의 진상을 보고하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는데
폴: 당시 광주에서 서울에 올라온 저를 평화봉사단 짐 메이어 단장은 저와 함께 미대사관으로 들어가 대리대사 사무실(Charge d’Affairs office)에 연락했습니다. 그때 저는 광주에서 일어났던 상황에 대하여 제가 보고 느낀 점을 사실대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일단 메이어 단장과 저는 대리대사 사무실 옆에 있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는데, 2시간 반을 있었는데 대리대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듣기를 원치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 단장과 저는 대사관을 나와 버렸습니다.
메이어 단장은 저의 광주 상항보고서 내용을 다른 평화봉사 단원들에게 전달하도록 조치했는데, 나중에 평화봉사 단원들은 미대사관에서 회합을 갖게 되었지만, 그 당시 저는 대만에 체류 중이었기에 그 대사관 회합에 참석하지 못해 직접적으로 저의 체험을 설명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대사관을 방문할 당시 왜 “문전박대”를 당했는지 정확한 사유는 모르지만,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당시 대리대사는 우리의 평화봉사단 활동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평화봉사 단원들이 평화봉사단에서 퇴출이 되어야 하고, 한국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언급을 일찍이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광주 5․18 당시 이후 한국의 군부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압력을 받은 적은?
폴: 1980년 5․18부터 1982년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광주에서의 경험이나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전달하게 될 경우 전두환 군부에 의해 추방조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두환 군부정권은 1980년 중반에, 광주에 남았던 우리 평화봉사단원 4명을 추방시키려고 했으나, 짐 메이어(Jim Mayer)단장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기에 봉사임무를 계속할 수 있었고, 계속 광주나 기타 봉사지역에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5․18 이후 몇 달 동안 저는 봉사 중에 마을지도자에게 ‘내가 언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 등등을 그때 그때 알려주어야 했었는데, 그것은 마을지도자들은 우리들의 동태를 당국에 보고하지 않으면 혼이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속한 주의 연방상원 의원(US Sen. Frank Church and US Sen. Steve Symms)들에게 미 정부가 “광주 학살” 사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다고 건의했는데, 답변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제게 맡겨진 봉사 업무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미 정부의 한국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폴: 솔직히 5․18 전까지 한국에 대한 미 정부 정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5․18로 저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당시 느낀 바로는 미 정부가 주한미군의 영향을 받아 전두환 군부에게 도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권을 존중한다는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가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 심한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카터 대통령이 평소 인권을 존중해 왔다는 점을 믿어왔기에, 그가 광주 학살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했는지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의 주위 사람들이 5․18에 대한 사실 정보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같은 결정은 카터 대통령의 인권 정책보다 당시 미국의 이익이 우선된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결국 저는 (당시 미국정부 정책)에 좌절했으며 분노감이 치밀었습니다.
▲광주 5․18항쟁이 40년이 지났는데 미 정부가 5․18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폴: 트럼프 행정부가 5․18에 대하여 역시 침묵했고 새 행정부에 기대를 하지만 재평가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한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5․18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을, 미 정부도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5․18 당시 서울의 미 대사관과 워싱턴 DC의 미 국무부 간의 외교비밀 전문들이 해제되어 많은 문서가 공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5․18에 대한 당시 미 정부의 대처 기록들을 재조사 파악하여, 당시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진정한 사과와 함께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 동안 언론보도에 따르면 5․18 당시 당신과 동료 평화봉사단들의 노력으로 미 정부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폴: 당시 5․18 이후 한달 여가 지나면서 서울의 미 대사관이나 미 정부가 전두환 군부에게 속임수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대사관 측의 관점이 변화됐다는 것은 제 자신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우리 평화봉사단의 5․18 보고서, 광주의 선교사들의 보고서 그리고 외신들의 보도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과 그의 정부에 대한 견해가 본질적으로 변화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한국의 군부는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군부 중심의 틀을 이어 가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같은 분위기에 미 정부도 한국이 그저 조용히 아무런 문제가 없기만 바라고, 경제적으로는 호황을 누리고 ‘귀찮은 문제 많은 나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미 국익을 우선 하는 것이지요.
▲그 동안 5․18 광주민주화운동 행사 참석을 코로나 때문에 못하게 되었는데...
폴: 두 가지 이유로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첫째,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광주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5․18 기념재단으로부터 이미 패널 참석 등으로 초청을 받은바 있습니다. 사실 저의 이야기는 제가 경험했던 훨씬 큰 이야기의 한 조각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42년 전 우리 평화봉사단원들이 5․18의 증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 기회를 원합니다. 특히 당시 광주사람들이 우리 봉사단원들을 극진히 대해 우리는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이번에 한국어로 출간된 저의 출판기념회 참석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어울려 즐기고, 특별히 좋아하는 ‘전라도음식’을 먹으려고 했는데 아쉽습니다. 제 심장과 영혼을 사로잡았던 당시가 새롭게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5․18 당시 함께 활동했던 봉사단원 팀 원버그, 데이빗 돌린저, 빌 아모스, 도널드 베이커 등과 교류를 하시는지?
폴: 팀 원버그씨는 1900년대 사망했고, 그와 마지막으로 교류는 그가 “광주 봉기: 내면상”이란 기사를 쓰기 전 저에게 제 일기장 기록을 참고 하겠다고 하여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데이빗 돌린저, 빌 아모스 도널드 베이커와는 가끔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데이빗 돌린저와는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고, 빌 아모스와는 3년 전에 만났는데, 현재 아이다호주 보이스에 거주하고 있는데, 제 고향이기도 해 고향 방문때 만났습니다. 돈 베이커와는 2년전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제가 관련된 비영리단체 이사회 참석차 방문했을 때 만났습니다. 그리고 쥬디 챔벌린과는 만난 지 벌써 20년이 넘습니다. 그녀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 현장
폴 코트라이트는...
폴 코트라이트 박사는 미국에서 대학 졸업후 미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전남 나주의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이후 20년간 이집트,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탄자니아에서 근무했으며, 탄자니아 모시 지역에서는 아내 수잔 박사와 함께 킬리만자로 안과센터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안과학회를 비롯해 실명 예방분야에서 업적을 인정받아 다수의 상을 받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대학 의대 겸임교수이자 영국의 실명예방전문 NGO인 사이트 세이버(SightSavers)의 트라코마 예방사업의 고문을 맡고 있으며, 현재는 아내와 함께 미 샌디에고에서 살고 있다.
한국과도 1980년대부터 공동연구를 진행했으며 2014년에는 국제보건 및 국제개발협력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연세대학교에서 ‘현장연구와 역학’ 단기코스를 진행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에서의 트라코마 퇴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저자 폴 코트라이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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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22.04.23 / 조회수: 329 2021년 펜타닐로 인해 직접 사망자만 41587명이다. 고강도 한타 술집업소 단속 시작돼 한 업소 40장 티켓 기록, 적발 전원 코로나 이전으로 강화된 업소 단속 압수된 양주 수만불어치는 어디로?? 가장 손쉬운 마약 구입처 된 노래방 각 인종별 성매매 전시장 된 노래방 불법 술집의... |
일자: 2022.04.23 / 조회수: 11 김진태가 강원지사 출마를 위해 과거 자신의 5.18 및 조계종 망언에 대해 사과하는 수모를 겪었다. 당연 진심 여부와 무관한 선거를 위한 쇼맨십의 사죄다. 김진태는 국회 앞 단식장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통해 우선 ‘북한군 5.18 개입설’을 주장한 지만원씨를 지지하면서 ‘5.18 문... |
일자: 2022.04.04 / 조회수: 71 한 업소 40장 단속 티켓 역대 최고 기록도 경찰 단속 업소 도우미 등 전원 적발 티켓 카지노 도박장으로 진화한 막가파 노래방들 코로나 사태로 업소봉쇄해 주택가 은밀영업 주택가로 성매매, 마약공급까지 우범지역화 한국 룸싸롱 2차 성매매 확산, 공항 단속대상 아로마센터 막가... |
일자: 2022.04.04 / 조회수: 20 니켈 검출 논란’ 코웨이 얼음정수기 한국은 보상, 미국 소비자는 어떻게 사측, 노조 쟁투에 피해는 소비자만 오너 도덕적해이에 피해는 소비자만 700만 임대 정수기 관리부실 항의쇄도 “중금속 검출 정수기, 100만원씩 배상” 한국코웨이, 웅진코웨이, 수차 사명변경 정수기의 설계 ... |
일자: 2022.04.04 / 조회수: 11 한국의 코로나 관련 방역 규제가 모두 풀리면서 입국자들로 인천공항이 크게 붐비고 있다. 코로나 자가격리가 풀리자 마자 여행객들이 몰리고 있다. 해제 첫날 인천공항에 2만명이 몰렸다. 해외입국자 격리 면제에 따른 여행 수요 급증으로 한인 여행사와 국적 항공사들이 팬데믹 ... |
일자: 2022.03.03 / 조회수: 16 ‘김치명장’ 김순자 한성식품 대표 진천 공장 썩은김치 70% 해외수출 드러나 미국한인 노린 불량식품 몰려와 헐값 판매 한인방송은 과대 사기광고로 노약자 현혹 김순자 대표 1호 김치명인 “자격 박탈하라” 쓰레기 제품, 발암물질, 소비자 피해 커 한성식품 김치 판 ‘롯데․NS·공영홈... |
일자: 2022.02.07 / 조회수: 19 인체유발시험에서 폐의 기능을 측정하고 있는 참가자. H-VIVO 제공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산세가 지속하면서 미국인 10명 중 9명은 옆 사람에게 감염된것으로 조사 결과가 나왔다. 오미크론이 생활 속 깊숙이 침투해 왔다는 증표다. 미 ... |
일자: 2022.01.06 / 조회수: 30 역대 최다 확진자 기록 미국 새해맞이 집단 파티 금지령 새해전야 행사 취소, 축소 오미크론에 세계는 속수무책 이탈리아•그리스, 사상 최고치 FDA, 머크 알약 치료제 승인 무증상 감염자도 장기 후유증 크루즈선 대확산 속에 영업강행 항공편 줄취소 연말 8500건 취소 미국 내 코... |
일자: 2022.01.06 / 조회수: 15 택배노조 소속 1650여명, 파업 시위 전국 동시다발 파업 돌입 배달 중단 세밑,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CJ대한통운 성남터미널에 선 진경호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 위원장은 “택배 산업이 국민들 삶과 연결돼 있는데 파업으로 정상... |
일자: 2021.12.08 / 조회수: 16 LA, SF에서 오미크론 첫 감염자 입국자 10일 격리 급선회 혼란 여행사는 환불 전화 폭주 혼란 갑작스런 자가격리로 혼선중 에티오피아 항공편 운항 중단 오미크론에 더딘 성장 물가폭등 한국 방문을 준비중인 한인들이 갑작스런 격리면제 중단으로 혼선을 빚고 있다. 미국 정부까지... |
일자: 2021.12.07 / 조회수: 37 <이슈취재> 이거 실화냐 | 이래도 되나, 매우 낯선 장면 포커 신동으로 추켜세운 한국 사회 올림픽 경기 상정 소망 텍사스홀덤 한국 내 수백곳 포커게임방 성업중 어른들과 홀덤 게임중 ‘신동 조은우’ 유명 연예인 체육인 바둑기사 등 열전 김학도, 임요한, 김창열, 김현철, 진미령 홀덤팝, 홀덤바, 홀덤장 유사 도박장 성행 참가비 50만... |
일자: 2021.12.07 / 조회수: 20 <한국의 재벌 기획보도> 계속되는 CJ 그룹 ‘타락의 늪’ 회장님 스폰서 성상납 루머까지 회장 비서 채용하며 성추행도 자행 아이즈원 최예나 측 ‘강경대응’ 예고 CJ 오너 일가 지시로 직원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대마초 오일을 구입해 전달한 것으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서울경찰청 마약범죄수사대는 지난달 CJ 오너 일가 고위인사 A... |
일자: 2021.11.04 / 조회수: 29 <화제집중취재> 재벌의 민낯 <1> | 죄만 지으면 휠체어에 환자 둔갑 횡령•배임•마약’ 범죄로 얼룩진 CJ그룹 ‘마약 밀반입’ CJ 이재현 장남 이선호 동생 이재환 횡령, 배임 집행유예 처벌 회삿돈으로 요트•고급차•캠핑카 쇼핑 직접 현장 지휘 이재현, CJ컵 골프대회 구속 피해 휠체어 연출 재벌회장들 익숙 한국 재벌가의 가족들이 순탄한 경우는 거의... |
일자: 2021.10.11 / 조회수: 36 빈민 세입자는 그래도 다행 구제안 환영 세입자 퇴거금지 시한 만료 급 재연장 LA시의회 9월 말일 급 통과, 퇴거 대란 방지 악덕 건물주, 불법 퇴거소송 제기 빈발, 당연 패소 카드, 빌린 돈으로 렌트비 지불, 부채 증가 23년5월과 코로나 만료 1년후까지 퇴거 유예 상업용 세입자... |
일자: 2021.10.06 / 조회수: 24 기획부동산과 지자체의 괴물 공영개발 ‘50억 클럽’ 곽상도, 박영수, 권순일, 등 현금 수백억 사용, 왜 현금을 모았나?? 비자금이나 뇌물 사용 가능, 토건비리 게이트 정용학은 왜 녹음파일과 돈뭉치 사진을 제출했나 경실련 “대장동은 짬짜미 토건부패” 수사 촉구 김만배 누나가 산... |
일자: 2021.10.06 / 조회수: 22 축구 국가대표 홍철이 10명이 넘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는 등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여자친구라고 밝힌 B씨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2년간의 연애에 1년 반을 제가 아는 것만 10명이 넘는 여성과 바람을 피워왔다”고 폭로했다. 홍철은 K리그 수원 삼성출신 현재 울산... |
일자: 2021.10.06 / 조회수: 19 <현장취재> 머 이런게 있노 | 래퍼 노엘, 끝내 사전구속 영장 청구 서울 이어 부산, 대구에서도 ‘의원직 박탈’ 국민청원 15만명 경찰이 음주 측정을 거부하고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를 받는 래퍼 장용준(21·예명 노엘)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음주운전 단속 경찰관을 폭행한 장제원 아들과 관련해 아빠찬스를 비난하는 장제원 의원직 박탈... |
일자: 2021.09.06 / 조회수: 16 약국 돈 뜯는 병원지원비 ‘악어와 악어새’ 국내는 국민청원까지 신청 불법 만연 백만불 단위 뒷돈 거래, 불법 처벌대상 병원 크기 개수 따라 금액 달라 갈취 국민 청원에 억울함 호소에도 처벌 무 불법 사례지만 적발, 처벌 한건도 없어 올림픽 길에 있는 한 약국, 나이가 든 약사... |
일자: 2021.09.06 / 조회수: 18 유럽각국, ‘심각한 위험’ 경보 발령 한국산 라면 신뢰도에 타격 농심 해물탕면, 팔도 라볶이 리콜 삼양·팔도까지 ‘라면 빅4’ 줄인상 한국산 라면에서 유해물질,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해외 언론보도에 라면 마니아들은 충격에 빠졌다. 과연 먹어도 되는 라면인가. 한 달이면 적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