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10명중 4명은 일년 동안 한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발표가 또 나왔다.
‘또’ 라고 하는 이유는 수년째 계속되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책을 읽는 청소년조차 일년에 독서량이 4,5권인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한달에 한권이 아닌, 일년 내내 한권의 책도 안 읽는다니, 다름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참으로 믿기 싫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일년 동안 책 한권 읽지 않고 보낼 수 있나 싶기도 하다.
독서가나 작가, 책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일년에 3-5백권 정도 읽는다고 한다. 5백권의 독서가 과연 무엇을 달라지게 했을까.
책을 읽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글을 읽지 않는 세상,
댓글이나 카톡도 조금만 길면 ‘장문을 보냈다’며 투덜대며 읽지 않는 세상.
동네서점이 문을 닫고 책이 팔리지 않는 세상이라고 한다. 시를 누가 읽는냐고, 요즘 시집을 사는 사람도 있냐는, 자조적인 말도 한다. 글이 죽었다는 말은 인문학이 사라져간다는 의미다.
크나큰 착각이다.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면 그 도시의 정치가나 장군을 찾기보다는 작가나 화가 등 예술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은 인문학과 예술의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이율배반이다.
문자보다는 영상이나 드라마, 음악에 인간들이 심취하는 이유는 물론 오감을 더 자극하는 탓일 것이다. 120여년전 시네마라는 영화가 선을 보인 이래 누구도 영상 때문에 신문이나 문자가 냉대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을 예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성기를 누린 신문구독율도 10년, 20년전에는 조,중,동이 서로 3백만 구독자를 자랑했었다.(절반은 뻥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적 신문인 뉴욕타임즈나 영국 타임즈도 절반 혹은 1/10로 줄었다.
몇 초짜리 ‘틱톡’ 같은 단순 동작도 몇 백만, 심지어 수천만명이 찾아서 본다. ‘오징어게임’ 같은 10시간이 넘는 드라마도 순식간에 수억명이 감상하는 세상이 되었다.
과거, 가죽으로 책을 만들었던 시기에는 황실이나 귀족, 특권층만 소유했다. 집 한채 값에 버금가는 고가이기도 했지만 귀하고 문자 해독도 어려웠던 이유다.
우리 민족도 책을 귀하게 여겼다. 중국에서 어렵게 들여와 양반과 고관대작들의 가보나 전시품으로 우대 받았고 그들만의 독점물이었다.
2천년전에 종이가 발명되고 가죽 책이나 목간(나무 책)보다는 쉽게 책이 만들어졌지만 인쇄술 발달까지는 대중화 되지 못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책이 대중화 된 것은 성서 때문이었다. 많은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서를 대중화 하였고, 또 권력층에서 대중에게 법이나 지시사항을 널리 알리기 위해 사용되면서다.
이후 르네상스를 맞아 기술의 발달과 학문 수요가 늘면서 책은 수요가 늘고 인쇄술과 책 제작 기술도 발전했다.
인간은 왜 글을 쓰는가
쓰는 자는 무서운 자다. 역사가 증명한다. 그래서 칼보다 펜이 무서운 것이다. 펜이 칼보다 무서운 이치를 깨달은 선대들이 남긴 글이니 새길만하다.
극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글을 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글을 쓴다. 아직 죽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 글쓰기다. 권능과 존엄을 나타내고 살아 있고 해방된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쓴다. 글은 자아의 표현이며 본질의 의미를 나타낸다.
글은 힘이 세다.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바꾼다.
돈키호테, 동방견문록, 예수의 네 제자도 도피 중에 글을 썼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집필했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빅터 프랭크),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솔제니친)에서도, 전쟁터에서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도 고난속에 글을 남겼다.
몇 년전 본 칼럼을 통해 소개한 ‘잠수종과 나비’를 쓴 ‘엘르’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기자, 작가)는 운전 중 뇌출혈로 갑자기 전신마비가 와서 눈만 깜박 일수 있었다. 보비는 병실에서 15개월동안 20만번 이상 눈을 깜박여 글을 썼다. 움직일 수 없는 육신, 무거운 납으로 만든 잠수종으로 몸을 짓눌린 채 영혼이라도 나비처럼 초원을 날고 싶었던 작가, 죽기 몇일전까지 쓴 책, 극한 속에서 눈만 깜박여서라도 글을 써야 하는 절박함은 무엇이었을까.
출간한 책이 서점에 나온 지 2주후, 44세 나이로 사망했다.
독서 연구자들은. ‘극히 소수만이 독서계층이 되고, 대중적인 독서 시대가 인류 지적 역사에 짦은 ‘예외’를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또 진화론자들은 ‘인류의 독서 시대는 극히 짧고 인류는 독서를 즐기지 않고 독서에 적합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인류는 인쇄된 종이에서 나와 이제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 읽는 시대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문자는 줄고 그림과 영상으로 교체되고 있다. 부모나 조부모가 읽어주던 동화책은 이제 크릭 하는 꼬마의 손에 따라 이야기를 듣는 시대로 변했다.
귀했던 책 수만 권을 컴퓨터나 USB에 저장해 다닐 수 있다. e-book(전자책)을 손쉽게 읽는 시대가 되었고, 오디어 북이 나와 책을 읽어주는 시대가 되었다.
원래부터 인류는 읽는 것을 싫어 하는 종족이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단언컨대, 책은 살아 남을 것을 믿는다.
아직 책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책 넘기는 소리가 좋아, 스크린보다 검은색 잉크의 문자가 익숙해, 새 책을 들고 첫 장을 넘기는 맛, 스크린으로 보는 맛과 달라, 등등의 이유가 그것이다. 순전히 개인 취향이긴 하다.
이사 때마다 버리는 책이 아깝지만, 오래된 책이 고가에 팔리기도 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손편지가 사라지고 주고 받는 문자가 줄어든다. 핸드폰과 디지털의 시대, 컴퓨터와 미디어 폭주 시대에 책은 설 자리를 잃어만 간다. 정녕 책이 죽는 시대가 도래하는 것인가.
책 속에 길이 있거늘, 오늘도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이여, 읽는 즐거움조차 모르는 세상이라니... 허망하고 헛되도다!!
< 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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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22.02.06 / 조회수: 23 한국인 10명중 4명은 일년 동안 한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는 발표가 또 나왔다. ‘또’ 라고 하는 이유는 수년째 계속되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책을 읽는 청소년조차 일년에 독서량이 4,5권인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한달에 한권이 아닌, 일년 내내 한권의 책도 안 읽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