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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한 패배자

admin 2020.01.20 16:22 조회 수 : 45

 ‘승리는 신들의 것’ 이란 말이 있다. 

인간은 모두 패자다. 패배는 인간의 것이란 의미다. 그렇다면 승리를 누리는 자들은 누구인가.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패배자지만 그 승리 또한 5분이란 해석도 있다.

인간은 모두 승리를 꿈꾼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승리자만이 살아 남는 결과지만, 그렇다고 모두 승리할 수는 없다. 승리자가 표본은 아니다. 그만큼 승패의 세계는 냉혹하기 때문이다. 

승리자들만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어쩌면 세상은 승리자보다 패배자가 더 많아 살만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모두 좌절과 아픔을 겪지만 거기서 쓰러지지 않고 운명을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 그들이 위대한 패배자이다. 승리의 의미가 있다면 패배 또한 의미가 있다. 추악한 패배자가 많은 세상에서 진정한 패배를 새길 만 하다.

좋은 패배도 있다. 좋은 패배자란 적어도 인생을 관조하는 자 일 것이다. 패배자는 느긋하게 웃을 수 있지만 승리자는 음흉하게 웃는다.

우리는 지구상의 패배자 전부를 알지 못한다. 주위의 패배자조차 모른다. 다만 그들 모두가 패배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나처럼, 역사속의 한 패배자처럼 말이다.

우리는 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적 승리자라 하더라도 시대와 공간에 적합하지 못하면 패배자일 뿐이라는 것을.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이 그 시대, 그 도시가 아닌 곳에 태어났다면 그저 평범한 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모든 패배 속에 승리가 있다. 실패는 새롭게 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것도 좀더 영리하게 출발할 기회를, 모두 역사 속에 살아있는 교훈이다.

다만 히틀러는 굴욕감과 좌절감에 학살과 잔인함으로 표출되었다. 역사는 히틀러를 ‘수없이 좌절한 부적격 인간의 복수심이 세계를 잔인하게 짓밟았다’고 기록했다.

 

추악한 승리보다는 아름다운 패배가 나을 것이지만 승패의 세계에서는 승리만을 갈망한다. 

승리를 갈망한다고 승리자들만 행복 속에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패배자에 대해 멀리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한 사람이라는 것, 나의 패배일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패자들의 노래를 찬양한다. 역사 속에서나 예술 속에서도 패자들의 노래는 높게 찬미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인공은 패자들이다.

패자들의 세상이 더 살만한 세상이란 것은 문학작품에서 알 수 있다. 순간 벼랑 끝으로 추락하고, 이유 없이 속고, 배신당하고, 좌절하는 사람을 끝내 평화로운 안식처로 안내하는 자는 작가이다. 한때 우리 삶보다 더 고통스럽고 좌절의 골짜기로 보내기도 하지만 작가는 찬란한 스토리를 선사한다.

 

가장 추악한 패배자는 러시아 작가 고골리가 만들어 낸 ‘외투’의 서기 바슈마치킨이다. 

주인공의 최대 꿈은 고급 외투를 사는 것이었다. 결국 굶고, 절약해 알뜰살뜰 모아 새 외투를 살 수 있었다. 새 외투를 입고 처음 거리를 활보하는 날 어두운 골목길에서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기고 만다. 바슈마치킨은 절망 속에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땅속에 묻혔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없이도 잘 굴러갔다. 마치 바슈마치킨이란 인간이 여기 살았던 적이 없었다는 듯이.”

패배도 이쯤 되면 할 말을 잊는다. 설사 외투가 삶의 전부라 하더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의미겠지만, 인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삶을 갉아먹는 사람들 .

패배 아닌 패배자, 추악한 패배자이다.

 

여기 또 하나 추악한 패배가 있다.

총 맞아 죽은 부모를 등에 업고 등극했지만, 그에게는 충분한 자질과 성숙은 없었다.

결국 이용만 당하고, 멋대로 농락만하다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의 승리는 뼈저린 패배가 되었다.

그러나 그 만큼의 승리도 값진 것임을 깨닫기에는 교만에 가려 좌절과 잔인함 이외에는 역시 자질과 성숙이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법을 지켜야 했고 패배 속에서도 지켜내야 할 것이 있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다. 승리의 순간 농락했던 것처럼, 패배의 순간에도 깨닫지 못했다.

모든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멋대로 농락했던 것처럼, 감옥 안에서도 법과 절차를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국선변호인마저 거부하고, 재판 불출석을 고집하는 박근혜. 

그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을 그는 한번쯤 생각은 하고 있을까.

아직은 남아있는 작은 승리마저 던져 버린 추악한 패배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 뭐길래, 외투가 뭐길래, 그것 없이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승리는 신의 것이기에, 패배는 인간이 누구나 당하는 것이다. 

다만 추악한 패배는 자신의 선택으로 저지르는 패악이다.

 

사실 패배하더라도 거들먹거리지만 않는다면 동정과 아쉬움도 남지만, 결국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러나 세상은 거들먹거리지 않으면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상이긴 하다.

이제 그만 거들먹거리고 세상에 순응하고 법치에 따라 반성의 시간을 갖기를 국민은 기다리고 있다.

 

아! 얼마나 어지럽힌 지난 5년이었던가

  < 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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