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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2018의 길을 묻다

admin 2020.01.20 14:44 조회 수 : 34

누군가는 그 길에서 쓰러졌지만, 우리 모두는 1987을 지나왔다.

그저 스치듯 지나기도 했지만, 때로는 최루탄에 눈물을 쏟아내고 피 흘리기도 했고 감방에 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 시대 사람들은 1987을 지나왔다. 그리고 서서히 잊혀졌다. 참혹했던 나날도 쉽사리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을 세월을 통해 터득하면서 고단한 삶속에 발을 뻗고 잠든 나날이었다.

그러다 새날이 왔다.

세상은 함께 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지난겨울 길 위에서 터득했고, 우리가 이루어 냈다는 희열에 함성도 질렀다. 

그러나 우리는 또 쉽게 잊는다. 그 길 위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고결한 피를,,,

시간은 책갈피에 끼워둘 수 없다던가,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고 우리는 잊는다.

 

1987년 1월 14일, 청년 박종철이 죽었다. 서울대생이었던 그는 당시 수배 중이었던 서울대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추적하던 공안 경찰들로부터 참고인 자격으로 체포됐고,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10시간동안 전기, 물고문 끝에 사망했다. 당시 박종운은 1계급 특진에 현상금까지 붙어 야수처럼 경찰들은 매달렸다. 

경찰은 사망을 은폐하려 했지만, 1월 15일 한 신문에 ‘경찰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해명을 위해 기자회견장에서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박종철이 사망 당일 오전에 밥과 콩나물국을 먹었고, 입맛이 없어서 냉수를 마셨다고 했다. 그런 다음 심문을 시작했는데, 땀을 흘리면서 “책상을 ‘탁!’ 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부끄러움도 없이 국민 사기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국가 충성과 반공을 앞세워 저질렀다.

86년10월에는 건국대에 29개 대학에서 모인 2천여 학생들이 8천명의 경찰에 포위돼 4일간 투쟁을 벌이다 도서관 건물 옥상으로 내몰린 채 1525명이 연행되어 법원이 1290명을 구속시키는 세계 최대 시위사건으로 기록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숨 가쁘게 달려온 1987년 6월9일, 이한열이 연세대 앞에서 시위 도중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다음 날인 6월10일은 6월 항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리고 이한열 열사는 7월5일 사망해 광주 ‘5,18 구묘역’에 잠들어 있다. 당시 이한열은 22살이었고, 박종철은 21살이었다.

 

6.10항쟁이후, 6.29선언으로 항복을 받아낸 후, 길 위의 시민들로 인해 옷을 벗은 자들도 많았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장세동 안기부장, 노신영 총리, 김종호 내무장관,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해임되었다. 1년이 지난 1988년 1월16일 새벽, 강민창은 끝내 구속되었다. 고문에 가담한 박처원 대공처장, 유정방, 박원택 경정, 조한경 경위, 강진규 경사,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장, 이정호 경장 등은 이미 구속되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 귀결은 일해재단을 앞세운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사독재 영구집권 계획도 두 사람의 고결한 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조롱거리 된 경찰의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누가 꽃다운 청년들을 죽게 했는가.

지난겨울 촛불시위도 평화만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그 길 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광화문 광장 곳곳에 한 겨울에도 노숙하며 신음하는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불의의 정권 수레바퀴 아래 곳곳에서 짓이겨 지며 신음하던 사람들. 블랙리스트와 민간인 사찰 등 괴수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피 흘렸다. 그리고 안간 힘을 다해 눈을 피해 남루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가문이 고통 받고, 가족이 깨지고, 친지들마저 박살내던 권력은 이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과거 친일파와 독재정권 앞잡이들이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낡은 것들이 사라져야 원하는 세상이, 새 세상이 온다.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선량하고 지극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으며 많은 것들을 자행한다. 그래서 반성도 없다. 악행에는 반드시 마땅한 변명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유도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추악한 범죄자로 몰락하고 역사는 기록한다.

아직도 경찰과 검찰은 적폐대상이고 제1 개혁대상이다. 권력을 쥐고 충견이 되어 국민 목을 쥔다. 권력의 손아귀에 잡힌 시민은 가엾고 불쌍하다. 

세상은 함께 힘을 모을 때 바뀐다. 물론 반대 반향으로 힘을 모을 때도 사회 변화는 발생한다. 나치가 발흥할 때도 독일은 모두 힘을 합쳤다. 유대인 학살에는 이 논리가 정당화해 독일은 도덕성을 상실했다. 일본은 아직도 논리의 정당화도 반성도 없이 극우의 길을 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촛불 시민혁명으로 몰락하고 새로운 세상이 왔다.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면서 빈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이 곳곳에서 날뛰고 있다. 국내에서는 요즘 ‘문빠’ 논란이 한창이다. ‘문빠’를 사칭하며 완장 행세를 하는 자들이 날뛰고 있다. 서로 민주화인사 행세로 진위구별까지 벌여야 할 세상이 LA한인사회다.

 

1987년과 2018년 사이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1987에도 국민적 여망은 길 위로 쏟아져 나왔다. 이한열 장례식에는 노무현 장례식처럼 백만명의 사람들이 길 위에 있었다. 그때는 관통하지 못한 것을 30년 후 지난겨울 관통했다.

아직도 국민의 여망을 한국당의 홍준표는 감히 좌파세력으로 매도한다. 아직도 선 긋기와 좌우 색깔론으로 판 가르기를 하는 것이다. 시대를 바꾸려 한 평범한 사람들의 간절하고 안간 힘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다스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 조롱 속에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린다. 기자와 아나운서가 현장에서 쫓겨나 건물 관리와 토스트 요리법을 배워야 하고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꿔나요’ 가 아니라 그래서 세상이 바뀐다는 것을 각인시켜야 한다. 역사가 그것을 기록하고 입증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터널 속에 있는가. 아니면 막 빠져 나온 것인가

2018년을 시작하며 우리에게 던지는 사회적 화두다. 한때 우리는 어둔 터널 속에 있었다. ‘영화 1987’를 보며 그 터널이 되살아났으며 어쩌면 아직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생각은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 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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