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한 출입처에 발령받아 갔을 때 이상한 분위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타사의 동료 기자들의 눈빛, 안내하던 공보계 직원의 어색해하던 태도 등등.
그곳에는 열명이 넘는 기자들 속에 기자 아닌 이상한 자가 함께 있었다. 짧은 상고머리에 40대 후반인 그는 지역 보안대에서 파견 나온 상사 계급의 사복군인인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어떻게 보안사 군인이 기자실을 출입해 기자들과 함께 있는 것인지를 항의하며 물었더니, 당시 규정과 상부의 지시 협조에 따른 것이라는 계장의 답변이었다.
기자실은 문화공보과 사무실 옆에 붙어 있었다. 그 과장과 계장은 5급과 6급이었는데, 다음 발령은 힘있는 총무과 아니면 회계과로 가는 코스였다.
2-3년 기자들하고 잘 견디면 승승장구의 탄탄대로를 가게 되어 잘 참고 견뎌야 하는 자리였다.
아침에 출입처를 가면 과장과 계장이 교대로 들어와 기자들에게 차와 담배를 내놓고 당일 업무보고를 하고 질문을 받고,,, 그런 식이었다.
점심은 청의 과장, 국장들이 돌아가며 대접했는데 특별한 공지가 있는 날에만 전원 참석하고 대개는 용건에 따라 혹은 친불친에 따라 참석했다.
가끔은 시장이나 부시장이 전체 회식을 하곤 했는데 거의 술자리로 이어지는 자리였다. 당연 퇴근 후 술자리 회식도 있었다.
당시 보안대 파견 직원은 기자실의 동정을 보고하고 새 정보나 기사 관련 정보를 보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배기자와 공모해 어느 날 기자실 입구에 “개와 보안대 요원은 기자실 출입을 금함”이라는 글을 붙였다.
당연 소동이 나고 혼란스런 상황이 되었지만 보안사 요원은 태도를 돌변 기자들에게 읍소 작전으로 비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요원의 출입은 계속되었고 최종 강행은 기자실에 대못을 박아 아무도 출입 못하게 하는 결단을 하기도 했다.
1987년, 박종철 열사가 죽임을 당하고 이어 이한열 열사가 죽고 엄혹한 시절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80년 5,18이후에는 신문사 사장실 옆에 ‘상무’라는 직책의 보안사 요원이 보도지침으로 언론검열을 실시하고 있었다.
어떤 기자는 술 취해 ‘상무’실 방문에 오줌을 싸고 가기도 했고 별별 방법으로 저항했다.
12,12 군사쿠데타
12,12군사반란을 보면 하나회와 보안사 활동이 나온다.
화제의 ‘서울의 봄’ 12,12쿠데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매운 펩사이신을 한 사발 들이킨 심정이었다.
무지막지한 무뢰배로 돌변한 국군의 모습에 울분을 쏟아낸 젊은 시민들이 많다고 한다.
전두환 반란군들이 쏜 총탄에 국군들이 죽어나갔다. 반란군들은 국군묘지에 묻혔지만 마지막까지 나라를 지킨 군인들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국군묘지 근처에도 갈수 없었다.
‘서울의 봄’ 영화의 압권은 “서울 지킬 군인 한 명은 있어야지!!”라는 대사로 정리된다.
군사반란을 저지르고 국군을 살해한 전두환 일당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반란군을 단죄할 검찰은 “내란죄는 미수의 경우만 처벌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당시 수사를 담당한 장윤석(75)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최근 회고에서 “내란죄가 기수에 이르면(성공한 내란) ‘공소권 없음 결정’이라는 내용은 형법 교과서에 나온 대로 했다”고 말했다.
장윤석은 당시 내란죄는 맞지만 국가발전에 세운 공을 내세워 불기소처분 했다는 것이다.
장윤석은 지금도 당연히 옳다는 주장이다. 장윤석이란 자가 누구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장만큼 곧은 인간인지 정치검사로 박쥐형 인간인지 말이다.
장윤석은 황영시 장군, 김계원 박정희 비서실장 등과 고향 선후배 친한 사이였다. 12,12이후 검찰국장 등 승승장구하다가 노무현 정부의 강금실 장관때 한직에 발령되자 장관을 비판하는 글을 남기고 퇴직했다
장윤석은 검찰을 나와 경북 영주에서 3선 국회의원을 했고 이후 한나라당에서 공천을 못 받자 무소속으로 2번 출마해 연거푸 낙선해 지금은 동북아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군사쿠데타, 검찰쿠데타
묘하게 전두환 군사쿠데타와 윤석열 검찰쿠데타가 닮았다.
전두환은 ‘워카부대’ 라는 군바리들을 곳곳에 낙하산으로 뿌렸다. ‘똥별’들은 국가 고위직을 섭렵했지만 대위, 영관급들도 경찰, 관청, 학교, 국가기관 등 사회 곳곳에 침투했다. 이들을 사회에서는 ‘워카부대’로 선별했다.
워카부대 세상에서 검사들은 눈치를 보며 설설 기며 살았다. 당시 우스개로 시민들은 ‘육대 밑에 서울대, 육사 밑에 검사’ 말이 80년대 내내 회자되었다.
지금은 검새놈들이 사회 곳곳에 침투중이다.
금감위원장을 비롯 최근 방통위원장으로 윤석열 직속상관인 김홍일을 지명했다.
하나회보다 더한 세상이 되었다. 줄만 잘 서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이래서 정치검사가 출세하는 세상을 증명하고 있다. 살인다 전도환 대신 윤석열은 어떤 칭호를 달아야 할까.
금융에 ‘1’도 관련없는 이복현 검새가 임명되더니 이젠 방송에 ‘1’도 전력이 없는 김홍일이 지명된 것이다.
이복현이나 김홍일은 특수통 검사이며 윤석열 라인이다. 한마디로 하나회=특수부 공식이 통하는 대목이다.
민주당이 “전두환 신군부가 정치군인들로 국가 요직을 독식했듯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모든 자리에 특수통 검사들로 채우는 것이냐?”라는 항변을 국민은 알아야 한다.
김홍일은 누구인가.
56년생으로 충남 예산 출신으로 예산고와 충남대를 나와 24회 사시에 합격했다. 거의 윤석열 10수처럼 8수해서 합격한 셈이다.
박영수 휘하에서 강력부, 마약부 등에서 근무했고 김홍일 밑에는 윤석열이 있다. 대표적 사건으로 BBK 이명박을 무혐의 처분한 검사이다.
이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치심을 잃은 지는 오래다.
그들의 행적을 그린 ‘서울의 봄’ 같은 영화가 나오면 어찌할 텐가.
그들이 반드시 단죄를 받아야 하지만 머지않아 그 날이 꼭 오기를 기다린다.
‘서울의 봄’처럼 ‘나라 지킬 한 명은 있어야지!!” 쪽팔리지 않겠는가.
반드시 나라 지킬 한 명이 나타날 것이고 역사를 바로 세울 정의가 실현될 날이 올 것이다.
마지막 남기는 말, ‘저런 때려 죽일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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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23.12.07 / 조회수: 47 80년대 중반, 한 출입처에 발령받아 갔을 때 이상한 분위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타사의 동료 기자들의 눈빛, 안내하던 공보계 직원의 어색해하던 태도 등등. 그곳에는 열명이 넘는 기자들 속에 기자 아닌 이상한 자가 함께 있었다. 짧은 상고머리에 40대 후반인 그는 지역 보안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