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언덕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안 도시답게 산으로 둘러쳐져 있고 경사진 산기슭에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눈 앞에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이 펼쳐져 있고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난다.
바다 위에 세워진 다리는 젖가락 두 개를 세워 버팀목으로 만든 모양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의 지배자, 정복자, 동방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도시, 유일한 부동항이며 태평양으로 향하는 유일한 항구다. 수심이 깊어 군함이나 대형 어선 정박이 가능해 해군 기지이기도 하다.
도시 개발은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조선인들은 대기근과 사대부들의 가렴주구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했다. 몇 십 가구의 이주민들이 정착한 후 입소문을 타고 금새 수 천명이 이주했다. 굶주려 떠난 사람과 일제 강제합방으로 나라를 잃고 떠난 사람들이 주로 모여들었다.
1910년에는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3.1운동이후 1920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크게 늘어 수십만명에 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국과 한인은 ‘해삼위’로 불렀고 일본은 ‘우라지오’ 불렀다.
한인들은 모여 집성촌 개척리를 만들었고 동네 이름은 ‘카레이스키아’로 불렀다. 스키아가 거리라는 뜻이고, 카레이스는 고려를 말한다.
개척리에 6천여명이 모여 살고 있었지만, 1911년 러시아 당국은 장티푸스 만연을 핑계로 강제이주 시키고 그곳에 기병단 병영으로 만들었다.
한인들이 강제이주 된 곳은 산기슭 신개척리로 이후 신한촌으로 불렀다.
신한촌을 거쳐간 영웅들, 이름없는 별이 된 그 시대의 영웅들은 누구인가.
3.1만세운동
1919년 3.1운동에도 참석한 신한촌 한인들은 1920년 3.1운동 1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2만명이 참석한 3.1운동 기념식에 당황한 헌병대는 러시아에 강력한 단속을 요구했고, 러시아 당국은 군인들을 동원해 공포 50발을 발사하며 군중을 해산시켰다.
한인 청년들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을 찾아가 “일본 정부에 전달하라”며 대한국민의회 명의로 한글과 러시아어로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건넸다. 또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관공서에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3.1운동의 불길에 놀라 탄압에 나선 일제는 1920년 4월 이틀간에 걸쳐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4월참변이다. 일본군은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하며,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마을을 파괴했다.
붉은군대(러시아) 군인들은 자국에서 일본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했다. 한인 마을들에 쳐들어온 일본군은 마을을 수색하고 파괴했으며 한인들을 구타하고 학살하고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신한촌에서만 죽은 한인이 무려 300여명에 이르렀다.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엄주필, 김이직 등도 학살당했다. 현재 우스리스크에는 4월참변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최재형의 죽음을 살펴보자.
일본놈들의 행태를 아는 최재형은 가족의 안위를 염려해 집으로 돌아왔다. 부인과 자녀들은 즉시 몸을 피하도록 설득 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는 “내가 피하면 일본인들은 가족들 모두를 체포해 갈 것이다. 고문하고 내가 있는 곳을 밀고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적지 않게 살았고, 죽어도 된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살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편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동이 트자 최재형은 마당에서 일본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인들은 아버지를 자동차에 실어 체포해 갔다. 사건은 1920년 4월 5일에 발생했는데, 일본인들은 이튿날인 4월 6일 가혹한 고문 후 총살했다
아직까지 최재형의 매장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난 8월8일,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최재형 선생의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 유해를 송환해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합장식을 가졌다
봉오동
요즘 봉오동의 영웅 홍범도가 튀어 나왔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16킬로 떨어진 험준한 산 병풍 지역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고 독립군 근거지로 최진동 장군의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
민가는 상촌(북촌)·중촌(남촌)·하촌 등으로,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다.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10km 정도 떨어져 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최진동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해 격파했다.
이 습격이 봉오동 전투의 시작이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했다. 이어 독립군이 남양수비대 60명을 사살한 곳이 삼둔자다.
삼둔자는 중국 도문시 간평 마을 주변으로 독립군은 주로 일제의 남양수비대와 종성수비대의 경계망을 뜷고 국내로 넘나들던 중요 거점이었다.
일본군 제19사단은 1개 대대 규모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진입해 독립군을 추격했다. 봉오동 전투의 서막이다.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대대를 격파하는 독립군은 700명이 3일간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였다.
최대의 패전에 일본놈둘은 봉오동 일대 민가를 불태우고 학살 만행으로 보복했다. 민가는 불타고 농민과 마을은 사라졌다.
공산주의 유령
갑자기 관속에서 튀어 나온 홍범도는 지금 공산당 전력에 갈갈이 찢기고 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공산주의는 남,북한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고, 당시 강대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독립군들은 러시아 공산당을 이용했을 뿐이다. 인류 최초 등장한 공산주의는 어느 곳에서도 꽃피어보지 못한 사상으로 ‘유럽을 떠도는 망령’이 될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그 공산주의를 추종자 운운하며 귀신 죽이기에 나섰다.
북한 공산당은 일제하에서의 독립군이 의지한 공산주의와는 다르다.
독립군들이 이용한 공산당은 조국 해방과 투쟁을 위한 보다 상위 개념의 독립운동이었다.
모던보이, 모던걸 행세를 하거나 일본 유학생, 양반 부잣집 도련님으로 호위호식 하던 자들과는 분명 고난의 길이었다.
특히 돈 몇 푼의 안락을 위해 동지들을 팔아 밀고한 친일 앞잡이나 밀정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독립투사가 죽어야 했고 무고한 민초들이 학살당했다.
밀정 한 명 때문에 마을 전체가 불태워지고 몰살되었으며, 농민들까지 끌려가 고문당하고 불령선인 낙인이 찍혀 수십 년씩 고초를 당했다.
밀정 한 명에 수백 수십 명의 독립군이 멸절되었고, 독립군을 지원한 마을이 불태워지고 사라졌다.
1920년 4월참변 이후 항일 투쟁의 주무대는 중국으로 옮겨갔고,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소멸되어 갔다.
4월참변에도 많은 밀정과 앞잡이들이 활약했다. 최재형이 집에 돌아온 시간도 다른 영웅들의 죽음에도 밀정의 농간이 작용했다.
일본놈보다 더 악질은 밀정인 것이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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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23.10.29 / 조회수: 34 블라디보스토크 독수리언덕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안 도시답게 산으로 둘러쳐져 있고 경사진 산기슭에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눈 앞에 러시아 유일의 부동항이 펼쳐져 있고 크고 작은 배들이 지난다. 바다 위에 세워진 다리는 젖가락 두 개를 세워 버팀목으로 만든 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