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예술은 길다.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은 느끼는 것이지만 일생동안 얻어진 지식은 좁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알아야 할 것은 캄캄한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인간의 생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절박함뿐이다.
그의 이름은 알폰소 무하, 영원한 슬라브인으로 살다가 민족의 별이 된 화가.
체코를 대표하고, 애국자이며 민족주의자로 살다가 79세에 히틀러 나치에 투쟁하다 고문 끝에 죽은 화가. 별이 되기에 충분한 무하를 소개한다.
알폰소 무하 (Alphonse Maria Mucha 1860 ~ 1939)
체코 모라비아의 이반지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법원의 하급 직원인 온드르게이였다. 어머니는 귀족 자제의 가정교사로 독신주의자였는데, 어느 날 꿈에 하늘이 열리고 천사가 나타나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을 돌보라는 계시를 받고 온드르게이와 결혼하고 무하를 낳았다. 이것이 무하의 첫 번째 기적이다.
무하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즐겨 그렸다. 어머니가 준 목걸이에 달린 연필로 그림그리기가 유일한 소일거리였던 무하의 8살때 그린 첫 작품은 ‘십자가’로 예수의 죽음을 그렸다. 타고난 화가, 거장이 되기에 떡잎부터 다른 무하였다. ‘십자가’는 프라하 박물관에 전시 돼 있다.
일하던 인쇄소가 불타 직장을 잃은 무하는 고향으로 돌아가 귀족들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의 재능을 알아 본 귀족 카를 쿠헨의 후원으로 파리로 가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아 대신 포스터와 잡지 삽화를 그리며 생활했다.
무하의 두 번째 기적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사라 베르나르를 만난 것이다. 이브날에도 무하는 일터에 있었다. 당시 인기 여배우 베르나르는 새로운 연극 포스터를 찾고 있었다. 그날 의뢰받은 연극 포스터 한 장이 무하의 인생을 바꾸었다. 기적처럼.
당시 포스터 크기는 대략 1미터 정도였다. 우연히 의뢰받은 ‘지스몽다’(Gismonda)로 불리는 포스터를 무하는 혼자서 두장을 붙여 2미터 크기로 화려하게 만들었다. 베르나르가 단번에 반한 포스터는 파리 시내 곳곳에 붙였지만 놀랍게도 다음날 아침 모두 사라졌다. 사람들이 아름다움에 반해 모두 집에 가져가 버린 것이다. 돌이켜보면 기회와 재능은 무하의 노력, 성실의 결과로 얻어진 결과였다. 크리스마스에도 성실하게 일한 결과가 행운을 가져온 것이다
폭발적 인기와 명성을 얻은 무하는 그때부터 승승장구 대성공을 하고 갖가지 포스터, 상품 디자인 등을 쉴 새 없이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무하의 작품세계
아르누보(신예술)의 상징이자 그래픽 디자인의 새 장르를 개척한 작품에서 포스터와 장신구까지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수많은 명작들을 탄생시켰다.
1880년대의 작품이 지금도 빛을 발하는 이유, 지금도 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는 이유가 무하의 천재성을 대변하고 있다.
‘대중을 위한 인쇄 출판물’로 예술 소통수단으로 삼고, 대중을 위한 예술로 지금까지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 포스터의 선구자지만 140년 전에 만든 작품들이 한 세기를 넘어 인정받고 있다.
로댕에게 배운 조각도 전설이 되었다. ‘자연’이란 조각 작품 역시 누구도 백년전의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 그만큼 현대감각이 뛰어난 탓이다.
무하의 대표작인. ‘황도12궁’(달력 겉표지로 12개의 별자리를 그렸다.), ‘사계’(4계절을 표현한 작품으로 특성을 여인과 화려한 꽃으로 표현했다.) 등은 착상이 기발하고 아이디어가 작품 곳곳에 숨어 있어 관람객들은 그것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갖가지 포스터는 무엇을 위한 포스터인지 내기를 할 정도로 오묘하다.
타로 카드, 애니메이션(일본과 한국) 등에서도 무하의 그림에서 주인공들을 차용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화가, 다방면에 천재인 작품으로는 ‘별이 된 화가’로써 부족한 것일까.
결혼과 함께 1906년 미국에 잠시 정착한 무하는 강연과 전시회로 4년을 보낸다. 1910년 체코로 돌아와 모든 것을 버리고 인생항로를 바꾸기로 결심한 무하는 민족과 예술만을 위해 죽을 때까지 매진하기로 한다.
무상으로 프라하 시청에서 첫 벽화 작업을 시작했다. 천장까지 어마어마한 대작 벽화를 남기고 이어 의회 건물 ‘유럽’,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등을 작업했다.
그리고 민족화 작업을 위해 공부를 시작한 무하는 슬라브민족의 발자취를 쫓아 여행을 계속 했다. 러시아를 방문한 시기는 피의 혁명이 휩쓴 1922년이었다. 이때 ‘러시아 복구’ ‘황야의 여인’ 등의 명작을 남겼다.
자료수집과 여행을 끝낸 후 무하는 ‘슬라브 서사시’를 시작한다. 무려 20년동안 20점을 그렸다. 놀라운 것은 작은 작품이 4.8미터, 큰 작품은 8미터로 모두 합하면 120미터나 되는 대작을 후반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쳐 그렸다. 슬라브 민족의 탄생과 역사 그리고 마지막 작품은 ‘슬라브여 영원하라’ 였다.
1929년, 히틀러의 체코 침공 이후 나치는 슬라브 민족성 말살을 위해 무하를 고문 끝에 죽게 했다. 히틀러는 많은 예술가들을 죽였다. 또 많은 그림도 불태웠다. ‘슬라브 서사시’도 불태우려 했지만 이미 가족들이 그림을 모라비아로 빼돌려 지금까지 남아있다. 현재 전 작품은 프라하 박물관 특별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무하의 3번째 기적은 고문 끝에 죽은 무하의 장례식장에서 일어났다.
나치의 엄포 아래 가족만 참석하라는 장례식장에 10만명의 민족이 행렬로 참석한 것이다. 장례식에서 무하는 체코의 별로 명명되었다. 지금도 무하는 체코의 별로 불린다. 대중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을 염려한 예술가 무하. 그가 유독 포스터를 선택한 이유에 우리는 더 큰 감명을 받는다. 가진 자들만 예술을 즐겨서는 안된다는 무하의 정신은 그가 남긴 말에 남아있다.
“포스터는 더 많은 대중을 계몽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일하러 가다가 멈춰 서서 포스터를 볼 것이고 정신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
체코의 별을 넘어 예술인의 별이 될 만하지 않는가. 실제 소행성1522는 무하의 별로 명명되었다. 명실 공히 별이 된 화가.
알폰소 무하여 찬란히 빛나라!!
< 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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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20.09.29 / 조회수: 32 세상은 넓고 예술은 길다. 세상을 좀 살아본 사람은 느끼는 것이지만 일생동안 얻어진 지식은 좁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알아야 할 것은 캄캄한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인간의 생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절박함뿐이다. 그의 이름은 알폰소 무하, 영원한 슬라브인으로 살다가 민족... |